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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있는 풍경

눈 오는 날엔 - 서정윤

by 너의세가지소원 2023.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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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오는 날에
아이들이 지나간 운동장에 서면
나뭇가지에 얹히지도 못한 눈들이
더러는 내 발에 밟히고 있다.
날으는 눈에 기대를 걸어보아도, 결국
어디에선가 한방울 눈물로서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의 허전함을 심어주겠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외로움을
불편해 할 쯤이면
멀리서 반가운 친구라도 왔으면 좋겠다.
날개라도, 눈처럼 연약한
날개라도 가지고 태어났었다면
우연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만남을 위해
녹아지며 날아보리라만
누군가의 머리 속에 남는다는 것
오래오래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조차
한갓 인간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눈물로 알게 되리라.

어디 다른 길이 보일지라도
스스로의 표정을 고집함은
그리 오래지 않을 나의 삶을
보다 <나>답게 살고 싶음이고
마지막에 한번쯤 돌아보고 싶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그 누구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나에게 <나>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이 부담스러운 것만큼
그도 나를 아쉬워할 것이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으며 살아야 하고
분노하여야 할 곳에서는
눈물로 흥분하여야겠지만
나조차 용성할 수 없는 알량한
양면성이 더욱 비참해진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나>조차
허상일 수 있고
눈물로 녹아 없어질 수 있는
진실일 수 있다.

누구나 쓰고 있는 자신의 탈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 갈 즈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 뿐이다.
하늘 가득 흩어지는 얼굴.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마지막을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용기와
웃으며 이길 수 있는 가슴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눈오는 날엔.

헤어짐도 만남처럼 가상이라면
내 속이 그 누구라도 불러보고 싶다.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눈이 그치면,
눈이 그치면 만나보리라.

80년대의 혹독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그 분위기를 돌파할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대한민국 문학 역사상 처음으로 시집이 10만 부가 팔리는 기적이 이루어졌다. 그 주인공은 지금 이 시 [눈 오는 날엔]의 주인공 서정윤 시인이다.

서정윤 시인의 대표작은 [홀로서기]이다. 당시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책받침, 연습장 등의 문구류는 대부분 순정만화 풍의 그림 위에 살포시 얹어진 서정윤 시인의 시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홀로서기]는 나중에 한번 블로그에 소개해 보겠다.

이름 그대로인지 그의 시는 대부분 서정적이다. 뭔가 아련한 그림이 그려지고 약간은 우울한 감정과 애틋함이 묻어 있다. 조용한 음악과 함께 스스로 조금씩 소리를 내어 읽어보길 권한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아 좀 그렇지만 추운 겨울 날 따뜻한 난로불을 쬐며 읽는다면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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